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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나 리시차 피아노 리사이틀] 그냥 쳤는데... 유튜브 4,500만뷰

유튜브를 보면 이런 피아니스트 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업로드가 안된 작품이 있다면 연주를 ‘못’해서가 아니라 시간 없어 ‘안’했을 가능성이 높은 이 계정의 주인은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그는 유튜브가 지금처럼 세상을 지배하기 이전부터 일찍이 유튜브 세계 정점에 올라 조무래기 유튜버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리시차가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월광’>의 3악장 조회수를 보세요. 원저작자인 베토벤도 깜짝 놀랄 수치입니다. 


아무튼 발렌치나 리시차는 과거 대가들의 온갖 기교적 도전을 영상물이라는 매우 현대적이고 정직한 방식으로 하나하나 상대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같이 매우 납득할만한 수준이었죠. 그렇게 이렇다할 콩쿠르 입상 경력도 없는 동유럽 출신 피아니스트는 메이저 레이블인 데카와 계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 어떤 유명 콩쿠르 입상자도 이루기 어려운 성취를 전례 없는 오기와 근성으로 획득한 것이지요.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을 해서도 발렌티나 리시차의 도전정신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레퍼토리를 쓱싹쓱싹 모아 훌륭한 앨범으로 만들어 발매했습니다. 

운 좋게 저는 지난 2016년, 한국에 내한 온 발렌티나 리시차를 직접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내한 당시 새롭게 발매된 앨범은 바로 헐리우드 영화음악 모음집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필립 글래스의 피아노 작품 모음집을 냈었죠. 

저는 그런 남다른, 자의식 충만하면서도 시의성 적절한 레퍼토리 선택에 매번 감탄했던지라 리시차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반짝거리는 작품을 골라서 연주하는지를요.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습니다. 

"그냥 음반사에서 시키는대로 녹음합니다"  - 발렌티나 리시차 

그 대답은 마치, 무슨 생각하면서 스트레칭을 하냐는 질문에 김연아 선수가 했던 답을 떠오르게 만들었습니다. 김연아 선수는 이렇게 말했었죠.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거지"  - 김연아

아아, 그렇습니다. 리시차의 필터 없는 대답을 통해 그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던 원동력이 ‘그냥’에 있었음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고뇌하고, 골몰해 음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만들어나가는 명인의 자세에서도 배울 것이 있지만 무심한듯 성실하게 연주해 빠르게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발렌티나 리시차 같은 피아니스트의 삶에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매 순간 장고하면서 언제나 악수를 내지르는 저 같은 사람이 참고할 만한 인생관이었습니다.

발렌티나 리시차를 만났던 2016년으로부터 5년이 지난 올해는 환상과 공상의 시대인 줄만 알았던 2020년대가 현실이 되었음을 알려준 뜻 깊은 해입니다. 2020년대를 맞이한 고전음악계는 어떤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을까요? 저는 2020년대를 죽어서 지배할 인물로 당당히 베토벤을 꼽습니다. 1770년에 태어나 1827년에 세상을 떠난 루트비히 반 베토벤의 생몰 연도를 기억하시길. 이에 따르면 2027년은 베토벤 사망 200주년이 되는 해이며, 올해인 2020년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베토벤이라는 이름에 200주년, 250주년이라는 굵직굵직한 숫자가 붙었으니 2020년대는 베토벤이라는 이름을 끝없이 무대로 불러들일 것입니다. 

그 시작이 될 올해는 2020년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미 전 세계 많은 음악 단체에서 베토벤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국내는 물론, 대한민국에 내한오는 연주자들 또한 다양한 베토벤 프로그램을 들고 올 예정인데요. 이번 발렌티나 리시차의 내한공연 프로그램도 모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로 채워졌습니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표제 달린 작품에서 나쁜 작품 찾기 어렵듯, 리시차가 연주하는 이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 또한 베토벤이 자랑스러워 할 작품들입니다. 또 기교적으로 보통의 도전정신 없이는 소화해내기 힘든 그런 작품들이기도 하지요. 발렌티나 리시차는 그런 작품들만 쏙쏙 골라 한자리에서 연주합니다. 실로 그 다운 프로그램입니다. 

2019년 3월 22일 일요일 오후 5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발렌티나 리시차의 이번 내한공연의 부제는 ‘격정과 환희’입니다. 왜 이런 부제가 붙었는지를 제 나름의 해석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공연에서 격정은 두 차례 일어납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템페스트’와 ‘열정’은 베토벤이 만들어낸 격정의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연주회는 이러한 격정을 지나 환희에 도달하는데요.

물론 환희를 담당하는 작품은 ‘함머클라비어’입니다. 앞선 작품들이 단조 이면서 쉴새 없이 피아노를 몰아 세우는 작품인 것과는 대조되게 함머클라비어는 장조이면서 또 구조적으로 탄탄하면서도 장대합니다. 정신적으로도 안정되어 있다는 느낌까지도 들죠. 물론 기교적으로는 앞선 두 작품처럼 고생해야 함은 동일합니다. 다소 2차원적인 해석이지만 연주회장에 가서 ‘격정과 환희’라는 부제를 그냥 뭉뚱그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정리하는 게 낫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아무튼, 이제 곧 발렌티나 리시차가 옵니다. 우직하게 제 갈길 가는 이 피아니스트는 자신이 해석하는 베토벤이 아닌 베토벤의 작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내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준비된 메뉴가 모두 끝나면 청각을 배부르게 할 다양한 앙코르가 준비되어 있을 테고 공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분명 ‘오길 잘했어’고 생각하면서 귀가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2020년 3월 22일을 새기며 두 달 뒤에 만날 발렌티나 리시차를 기약해봅니다. 
글 ㅣ 윤무진 (음악 칼럼니스트) 

* KOPIS 블로그에 실린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