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PRESS

[창작산실, 팔음] 15세기 음악에 21세기 도시감성을 입히다

 

악기를 구성하는 재료는 소리의 색채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쇠로 만든 악기에선 쇳소리가 나기 마련이고, 실(현)을 뜯어 연주하는 악기에선 현 굵기에 따라 울림의 길이나 색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동양이나 서양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음악그룹 ‘나무’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의 일환으로 선보이는 공연의 제목인 ‘8음(八音)’은 여덟 가지 소리를 뜻하는 용어이자, 국악기를 제조할 때 사용하는 여덟 가지 재료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쇠(金), 돌(石), 명주실(絲), 대나무(竹), 나무(木), 가죽(革), 바가지(匏), 흙(土)이 그것들이죠. 장고는 나무와 가죽으로, 가야금은 명주실과 나무로, 대금은 대나무로 만듭니다. 이러한 분류법은 1493년 조선조에 편찬된 음악서 <악학궤범> 중 ‘팔음도설(八音圖說)도설’ 편에 그림과 해설로 잘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팔음(八音)’을 공연명으로 내건 음악그룹 나무는 대금연주자 이아람을 예술감독으로, 황민왕(타악기), 최인환(베이스)로 구성된 앙상블입니다. 이번에는 성시영이 함께 하여 피리와 태평소가 곁들여지고, 4명의 무용수(송영인‧박혜영‧이영은‧박수정)가 함께 합니다. 


​>> ‘팔음’의 첫 번째 모티프-이아람의 대금 <<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음악가들은 그들이 배운 ‘전통음악’을 토대로 오늘의 감수성이 담긴 새로운 한국음악을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오래된 음악’에서 ‘미래의 음악’이 될 수 있는 키워드와 요소를 길어 올리곤 하는데요, 그룹 나무의 이아람은 이러한 움직임을 활발하게 보여주고 있는 음악가 중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8음(八音)’ 공연의 모티프도 “대금이라는 악기를 통해 전통음악을 처음 접할 때부터 이 ‘8음’은 제 몸의 손과 발처럼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라며,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그가 연주하는 대금은 ‘팔음’의 재료 중 대나무로 만든 악기입니다. 대금에는 청공(淸孔)이라 불리는 독특한 구멍이 있어서 ‘찌리리’하면서 뭔가 날카로운 소리가 내뱉곤 합니다. 이 구멍이 그 소리를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 소리는 그 구멍을 덮고 있는 얇은 막을 울리며 나오죠. 그 ‘막’이 참 중요한데, 이것은 갈대나 대나무에서 뽑아낸 얇은 ‘청’으로 되어 있습니다. 잘 찢어지기에 대금연주자들은 이를 보호하기 위해 악기마다 쇠로 된 ‘청공 가리개(덮개)’를 사용합니다. 

그 청공 가리개! 그것에는 ‘팔음’을 대표하는 여덟 개의 악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공연의 첫 번째 모티프는 이아람 자신의 악기(대금)에 새겨져 있는 그 ‘무늬’와 그 속에 담긴 ‘역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팔음’의 두 번째 모티프-하늘로 올라가는 음악, 종묘제례악 <<

청 가리개에 새겨진 ‘팔음’의 모양이 첫 번째 모티프로 시동을 건다면, 종묘제례악은 두 번째 영감이자 ‘팔음(八音)’ 공연의 뼈대를 잡는 중요한 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의 역대 국왕에게 바치는 제사의식을 ‘종묘제례’라 하고, 이때에 사용하는 음악을 ‘종묘제례악’이라 합니다. 종묘제례가 오르는 곳이 ‘종묘’이죠.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이곳은 조선조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입니다.

​하늘에 있는 조상들에게 보내는 음악인만큼 이 음악은 점잖게, 제례의식화 함께 흘러갑니다. 특히 ‘추성(推聲)’이라는 기법이 발달된 음악인데요, 밀 ‘추(推)’, 소리 ‘성(聲)’자로 되어 있습니다. 선군의 업적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한 음절마다 그 끝소리를 밀어 올려서 ‘추성’이라 하는데, 어떻게 보면 하늘에 계신 조상들을 위해 공중으로 그 소리를 ‘올려보낸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소리가 오르고 올라 하늘에 닿았던 것이지요. 


>> 세종대왕을 향한 젊은 음악가들의 오마주 <<

이러한 종묘제례악은 세종대왕과 관계가 깊은 음악입니다. 작년 12월에 개봉한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에는 세종과 장영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당시 세종(재위 1418~1450)은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세종대왕은 재위 시절에 전승되어오던 종묘제례악의 의문을 갖기 시작합니다. 당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아악’은 본시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살아서는 ‘우리 음악’을 듣다가 왜 죽어서는 중국의 제례악을 들어야 하는가?”

조선의 선왕을 모시는 제례에서 중국에서 전래된 제례음악(아악)을 연주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 세종의 생각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팔음(八音)’ 공연을 위한 이아람의 두 번째 모티프가 나오는데, 그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전해 내려온 전통음악(종묘제례악)은 다음 세대에 어떤 모습으로 계승되어야 할까”라는 의문을 토대로, 종묘제례악을 해체하여 오늘날의 감각에 맞게 재구축했다고 합니다. 즉, 전통음악은 흘러오되, 어느 때는 변화의 옷을 입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는 그만의 생각인 것이죠. 


>> 창작을 위한 연료로 사용되어온 종묘제례악 <<

그 전에도 종묘제례악은 새로운 한국음악의 중요한 소재가 되곤 했습니다. 작곡가 김영동은 종묘제례악의 한 악곡인 ‘전폐희문’을 토대로 <전폐희문과 대금시나위를 위한 ‘겁(劫)’>을 작곡했는가 하면, 음악그룹 비빙은 전자음향과 제례악을 한데 섞어 ‘첩첩’이라는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2015년 ‘한국-프랑스 상호교류의해’ 개막작으로는 파리 국립샤이오극장에서 개막공연을 장식하기도 했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대회 및 동계패럴림픽 성공기원공연을 위해 오르기도 했습니다. 

제례악은 죽은 자를 위한 제사음악이지만 그 안에는 전세계에서 볼 수 없는 음악, 노래, 그리고 ‘일무’라 불리는 무용이 함께 합니다. 


>> 자연의 팔음 vs. 도시의 팔음 <<

한 시대의 음악은 그 시대의 소리와 재료들을 먹고 성장합니다. 조선조에 연주되던 종묘제례악은 과거 자연에서 구할 수 있었던 악기들이 내던 소리도구(악기)들로 구성된 음악이며, 자연 속에서 살아가던 조선인들의 청각에 맞게 만들어진 음악입니다. 

음악그룹 나무는 ‘팔음(八音)’ 공연을 통해 21세기형 종묘제례악을 선보입니다. 한마디로 플라스틱, 비닐, 종이, 물, 전기 등으로 이뤄진 현대문명 속에서 울려 퍼질 종묘제례악인 것으로, ‘도시의 종묘제례악’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최인환의 콘트라베이스나 일렉트릭 베이스를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뜻과 닿아 있습니다. 

공연장 바닥에는 앞서 말한 <악학궤범> 속 ‘팔음도설’의 그림과 문자들이 영상으로 투사되고, 4명의 무용수들이 종묘제례악에 사용되는 춤 일무(佾舞)를 재해석하여 미니멀한 몸짓과 도구로 표현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함께 태어나는 ‘도시의 종묘제례악’을 함께 만나는 시간이 이번 ‘팔음(八音)’ 공연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글 ㅣ 송현민 (음악 평론가) 

* KOPIS 공식 블로그에 실린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