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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바람 외] 40주년 맞은 광주민주항쟁, 공연으로 재탄생

 

"또 그날이 왔구마니라. 오늘은 곳곳이 제사 날이요. 이놈의 봄만 되면 미처 불겄어. 봄이 봄이 아니라 겨울이요. 맴이 휑허요. 그날 이후로 한동안은 아무것도 못혔어라.​"

2020년 봄은 봄다울까요? 올해 5·18 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습니다. 아픔을 기억해서 상처를 보듬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다양한 기념행사가 준비 중입니다. 공연계 역시 마찬가지죠. 

5·18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사람의 ‘움직씨’는 과거형입니다. 살아 있는 자의 움직씨는 현재형이죠. 움직씨는 사물의 동작이나 작용을 나타내는 품사인 동사(動詞)와 같은 말입니다. 움직씨라는 비교적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쓴 이유는 어조가 주는 꿈틀거림 때문입니다. 공연 장르는 무엇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부지런히 이야기, 노래, 움직임을 만들어냅니다. 

이미 공연계는 5·18의 끔찍함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해왔습니다. 서두에 대사를 옮겨놓은 연극 <짬뽕>은 2004년 초연, 매년 5월이면 대학로 무대에 올라왔죠. 작년까지 지역을 돌며 꾸준히 공연됐습니다. 

5·18이 짬뽕 한 그릇 때문에 일어났다는 설정의 블랙 코미디입니다. 짬뽕 배달사고로 5·18이 일어났다고 믿는 중국집 ‘춘래원’ 식구들이 소박한 꿈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좌충우돌 해프닝을 그렸습니다. 

많은 연극 팬들이 기억하는 작품으로는 5·18의 비극을 희극으로 승화한 연극 <푸르른 날에>가 있죠. 극작가 정경진의 원작을 재기 발랄한 연출로 이름 난 고선웅이 무대로 옮겼습니다. 5·18 속에서 꽃핀 남녀의 사랑과 그 후 30여 년의 인생 역정을 구도(求道)와 다도(茶道)의 정신으로 녹여냈습니다. 무거운 주제를 촌철살인의 입담과 고 연출의 리듬감으로 풀어냈죠. 2011년 초연 이후 2015년까지 매년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하며 '5월의 연극'으로 자리매김, 마니아들을 양산했습니다. 

이밖에 5·18을 다룬 동명 영화가 바탕인 뮤지컬 <화려한 휴가>, 학생들에게 5·18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만든 뮤지컬 <비망>, 5·18을 정면으로 다룬 드라마가 바탕인 뮤지컬 <모래시계>, 5·18 피해자와 가해자를 등장시킨 연극 <슬픔의 노래>, 놀이패신명의 오월마당굿 <일어서는사람들> 등 다양한 장르들이 5·18을 곁을 맴돌아 왔습니다. 

40주년인 올해 역시 5·18을 톺아보는 공연들이 찾아옵니다. 관객이 저마다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입체성이 눈에 띄네요.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의 ‘휴먼 푸가’(Human Fuga)가 대표적입니다. 5·18을 다룬 작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가 원작이에요. 작년 11월 배요섭 연출로 초연했죠.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받은 ‘소년이 온다’는 2019년 6월 <더 보이 이즈 커밍(The Boy is Coming)>이라는 제목으로 폴란드 스타리 국립극장에서 공연되기도 했습니다. 배 연출과는 전혀 다른 버전이에요. 

​특정 서사가 없는 <휴먼 푸가>는 사실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입니다. 유리병, 카세트테이프, 의자, 밀가루 등 여러 상징으로 해석되는 오브제를 적극적으로 활용, 극을 퍼즐화했습니다. 배우가 아닌 퍼포머로 명명돼 무대에 오른 이들의 신체와 행위, 그리고 음악마저 오브제처럼 사용되죠. 

​이런 태도는 희생자들을 감히 위로하거나 함부로 판단하는 우에서 벗어납니다. 조각 같은 장면들을 결국 퍼즐처럼 결합해 거대한 아픔을 형상화하죠. 아직 정확한 날짜는 공개되지 않았는데 올해 재공연이 예정돼 있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9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된 M발레단의 <오월바람>(1월 11~12일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도 주목할 만한 작품입니다. 5·18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픽션을 더한 ‘이야기 발레’를 표방합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시민군과 계엄군의 충돌을 격렬한 군무로 표현합니다. 인간적인 삶의 필수 조건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 그 순간을 몸짓에 격렬한 감정을 담아 표현을 하죠. 

​섬세하면서 사실적인 표현이 담긴 캐릭터의 동작은 기존 고전 발레의 몸짓과는 다른 결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가 됩니다. 무용수들의 몸짓이 어떤 평화, 화합의 메시지를 던질지도 눈길을 끕니다. 국립발레단 부예술감독을 역임한 문병남 예술감독이 이끄는 M발레단은 ‘한국발레의 정체성 구축’을 모토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광주를 기반으로 삼은 문화예술단체들은 5·18 40주년을 기념한 공연 개발에 더 분주합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대표적인데요. 2019년 10월 시범공연으로 <시간을 칠하는 사람>을 선보였습니다. ‘건물이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렸는데, 5·18 최후 항쟁지였던 전남도청과 연관된 ‘칠장이’의 이야기입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2019년 5월 선보인 연극 <나는 광주에 없었다> 역시 올해 다시 찾아옵니다. 5·18 민주화운동을 관객이 무대 위에서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인데요. 앞서 언급했던 5·18을 다룬 대표 연극 <푸르른 날에>의 고선웅 연출과 그가 예술감독으로 있는 극공작소 마방진 배우들이 함께 합니다. 

여기서 다시 움직씨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공연보기는 몸뿐만 아니라 정신, 마음까지 현재진행형의 움직씨로 무대와 객석을 가로질러야 합니다. 올해 5·18 공연들은 그런 깨달음을 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아픔에도 언제나 답을 찾을 겁니다. 늘 그랬듯이요. 공연은 비극을 딛고 현실에서 일어설 수 있는 장치 중 하나입니다. 

글 ㅣ 이재훈 (뉴시스 기자)

* KOPIS 공식 블로그에 실린 글 입니다.